‘역대급 불지옥’ 못피한 국가유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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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급 불지옥’ 못피한 국가유산들
영남 산불이 사상 최악으로 번지면서 전란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천년고찰 고운사의 주요 전각들이 모두 잿더미로 변했다. 서울 여의도 면적 156배의 광대한 산림이 불타고 인명 피해까지 초래한 이번 산불로 보물로 지정된 고운사 연수전과 가운루를 포함해 오랜 세월을 견딘 수십 점의 문화유산이 불타 사라졌다.
29일 국가유산청에 따르면, 전국에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산불로 국가지정 보물 2건, 명승 3건, 천연기념물 3건, 민속문화유산 3건과 시·도지정 19건 등 총 30건의 문화유산이 피해를 입었다. 경북 북부 지역을 휩쓴 대형 산불의 주불이 잡히면서 국가유산 피해 현장은 일단 숨을 돌렸지만, 추가 조사가 진행됨에 따라 피해 규모는 더 늘어날 가능성이 크다.
지역별로 보면 경북 안동에 있는 국가유산 피해 사례가 13건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경북 청송(7건), 경북 의성(4건), 울산 울주(2건) 순이었다. 특히 경북에는 한국 불교 역사를 대표하는 사찰과 조선시대 양반과 선비 문화가 남아있는 고택과 서원 등이 밀집해 있어, 산불 피해가 컸다.
화엄종의 시조인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운사는 경북을 대표하는 대형 사찰이자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였다. 그러나 이번 산불로 사찰 곳곳이 처참하게 훼손됐다. 불길이 급격히 번지면서 보물로 지정된 연수전과 가운루 두 건물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소실됐고, 나머지 건물들도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2020년 보물로 지정된 연수전은 조선시대 임금 영조와 고종의 ‘기로소(耆老所)’ 입소를 기념해 지어진 건물이다. 기로소는 70세 이상 정이품 이상의 문관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된 기구로, 고운사 연수전은 조선시대 사찰 내에 세워진 기로소 건물 중 원형을 유지한 유일한 사례였다.
계곡을 가로지르는 독특한 구조의 누각인 가운루도 화마를 피하지 못했다. 조선 중후기 건축양식이 잘 보존된 이 건물은 지난해 7월 보물이 된 지 불과 8개월 만에 전소돼 안타까움을 더했다. 향후 조사가 진행될 예정이지만, 보물로서의 가치를 온전히 유지할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다.
안동 지산서당·지촌종택·국탄댁과 청송 사남고택·만세루 등 옛 전통과 역사를 간직한 건물도 전소됐다. 불에 타 사라진 지산서당은 조선 후기 문신인 지촌 김방걸(1623~1695) 선생의 덕을 기리기 위해 1800년에 세운 서원이다. 이곳과 불과 20여m 떨어진 지촌종택도 화마를 피해가지 못했다. 경북도 민속문화유산인 지촌종택은 김방걸 선생을 모시는 종가로, 본채와 곳간, 문간채, 방앗간 등과 조상의 위패를 모신 사당, 별묘로 구성돼 있는데 모두가 불에 타버렸다. 김방걸 선생의 후손인 김시정 공이 분가하면서 조선 후기에 지은 집인 국탄댁도 전소됐다.
식물분포학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국내 몇 안 되는 숲도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수령 100~200년의 측백나무 300여 그루가 있는 안동 구리 측백나무 숲과 우리나라 동해안 쪽에 있는 유일한 상록수림인 울주 목도 상록수림 0.1㏊(약 302평)가 각가 소실됐다. 경남도 기념물인 수령 900년의 하동 두양리 은행나무도 불길을 피하지 못해 상당 부분이 불에 타거나 부러진 상태로 확인됐다.
긴박한 상황 속에서도 국가유산을 지키려는 노력은 멈추지 않았다. 국가유산청은 봉정사와 부석사 등 주요 사찰과 종가에서 소장한 유물 24건(1581점)을 안전한 곳으로 옮겼다. 사찰과 석탑 등 44건의 문화유산에는 불이 번지지 않도록 방염포를 설치했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 촬영지로 알려진 안동 만휴정은 불길이 덮치기 전 방염포를 덮고 물을 뿌린 현장 관계자들의 신속한 대응 덕분에 극적으로 소실을 면했다. 한때 불길이 직선거리로 3㎞ 내로 번지며 ‘초비상’ 상태에 놓였던 유네스코 세계유산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은 가까스로 화를 피할 수 있었다.